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세요...?(1)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세요...?
문학홍대병으로 인해 대중픽으로 일컬어지는 작가들의 작품을 피해오던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도전하며 나를 스친 생각들에 대해 적어 보련다. (줄거리 등 스포를 최대한으로 지양했다)
1. 하루키를 기피하던 이유
그리고 수년이 시간이 지나 나는 한국 문학에 빠져들었고 자의식 과잉의 독자가 되어 문학 홍대병에 걸렸다. 문학 홍대병에 걸리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어떤 작품을 좋아하는 것이 일종의 '간지 부족'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책은 문학도(편의상 이 같은 표현을 썼다)와 비전공자가 두루 읽는다는 점에서 대중성을 갖고 있다. 대중성은 곧 '간지 부족' 상태에 봉착하는데, 소수의 문학도들끼리 그들만의 언어로 이야기하기가 불가능하며 언제든 다수의 대중으로부터 나의 '고급 독자적 감상'에 참견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선다. '나'만 읽은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읽었다는 사실. 다시 말해 문학 홍대병이란 "대중들이 미처 모르는 멋진 책만 골라 있는 나",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읽는 특별한 나"를 말한다. 유일하게 빛나는 마이너 추구하기 위해 대중성을 의도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떤 선배가 내게 "야 문학 자체가 이미 마이너야"라고 말했다. 반박할 수 없었다. 고교 시절 나는 반에서 유일하게 시를 읽고 시를 써서 문창과에 온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넌 이미 존재 자체가 마이너한데 뭘 그렇게 마이너로 파고들어?"로 들린 것이다. 선배 말이 맞다. 글을 쓰고 읽어줄 천만 독자를 기대하면서 나는 마이너 만을 추구하는 모순적인 인간이었다. 그래서 기피해온 책들을 읽었다. 그러면서도 하루키는 끝끝내 안 읽었다. 이 지독한 회피는 오래전 잠시 <1Q84>를 펼쳤던 옅은 기억 때문일 것이다. 초반 줄거리는 일절 떠오르지 않지만 발가벗은 여자가 주차장 철골 계단을 내려가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것을 본 나는 중고등학생으로 그 장면이 유쾌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 장면이 소설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군가 하루키 좋아해?라고 질문하면... 그 장면이 떠오른다.
2. 하루키를 읽게 된 몇 가지 이유들
Monday's child is fair of face,
월요일에 태어난 아이는 얼굴이 예쁘고
Tuesday's child is full of grace,
화요일에 태어난 아이는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고
Wednesday's child is full of woe,
수요일에 태어난 아이는 슬픔이 많으며
Thursday's child has far to go,
목요일에 태어난 아이는 먼 길을 가야 하고
Friday's child is loving and giving,
금요일에 태어난 아이는 사랑스럽고 베풀 줄 알며
Saturday's child works hard for his living,
토요일에 태어난 아이는 생활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만 하며
And the child that is born on the sabbath day
Is bonny and blithe, and good and gay.
일요일에 태어난 아이는 예쁘고, 즐겁고, 착하며 명랑하다.
용강은 어떤 요일에 태어났는지 물었다. 나는 월요일의 아이였다. 주위 사람들의 태어난 요일을 검색한 뒤 그 사람이 어떤 요일에 태어났는지 찾았다. <마더 구즈>는 영미권에서는 아주 잘 알려진 시라고 하는데 (시라고 하지만 거의 구전에 가까워 보인다) 드라마 <웬즈데이>도 이 시에서 비롯된 작명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러다 어쩐지 부끄럽지만 당당할 수 있는 문학홍대병 증상으로 인해 나는 그들에게 "실은 나 하루키 읽은 적 없어"라고 고백했다. 예상한 반응은 약간의 혐오가 섞인 궁금증, 으레 문학홍대병을 직감한 끄덕임이었다. 그런데 용강이 "부럽다"라고 답했다. 하루키를 안읽으면 그 감동이 있을 거니까 부럽다는 건데... 다음날부터 친구들이 태어난 요일을 알아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도 계속 그 말이 생각났다. 부럽다고? 하루키를 읽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로 부터 얼마 안 된 어떤 날 짝꿍이 하루키를 읽어본 적 있냐고 물었다. 이게 무슨 하루키 유니버스지? 세상이 하루키의 책을 가리켜 읽. 어.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쯤 짝꿍은 취미로 러닝을 하기 시작했는데, 하루키가 쓴 달리기에 관한 책에 관심이 생겼다는 것이다. 주위에서 계속해 하루키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입술을 굳게 닫았으나, 의도치 않게 하루키에 대해 이것 저것 찾아보면서 작가에 대해 관심을 가진 뒤 결심했다. 이 병을 완전히 치유하기로.
3. 무엇으로 하루키에 입문할 것인가
하루키는 책을 워낙 많이 써놓았고 그만큼 판본도 많다. 하루키가 뛰어난 에세이스트이긴 하지만 메인은 여전히 소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른바 '소설 뿌시기'가 목표가 됐다. 민음사, 문학동네, 비채(김영사), 문학과 사상(사)가 하루키의 책을 나눠서(?) 출간했다. 단편집, 장편, 심지어는 특별판 등 하루키의 명성답게 책이 대단히 많았다. 교보문고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저자 검색으로 순수하게 나오는 책은 435권이며 e-book과 에세이 등을 제외하더라도 국내 도서-소설 필터에 147권이 집계된다. (심지어는 하루키를 어떻게 읽는 것인지 탐구한 책들도 굉장히 많았다)
등단작부터 지금까지 천천히 나온 책들을 읽는 것이 내가 생각하기에 알맞은 접근 방식인데, 최근에 나온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만 생각해도 그가 신인시절에 쓴 것을 각색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기 상의 문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고민하던 와중에 트위터에서 "어릴 적 엄마가 내게 도쿄기담집을 추천했다"는 글을 보게 되었다. 지금 원글을 찾아보려니 보이지 않는데, 그 트윗에 내용은 '그때 내가 그 책을 읽기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그 책을 추천했고, 당시엔 이해되지 않았는데 그런 게 팬심이다'라는 내용의 트윗이었다. 결국 하루키 입문으로 <도쿄기담집>을 구매했다.
4. 그리하여 읽은 책들
도쿄기담집_비채
책은 다섯 개의 챕터로 나누어져 있고 무라카미 하루키 본인이 직접 등장하는 《우연 여행자》으로 시작한다. 그 뒤로는 단편이 모여 있다. 단편은 《하나레이 해변》, 《어디가 됐던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 《시나가와 원숭이》로 구성된다.
뒤로 갈수록 개 재밌었다. 저급한 표현이지만 개 재밌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우연을 다루고 있지만 실은 삶의 불편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이 흥미로운 요소였다. 사람이 사라지거나, 더 이상 볼 수 없어 답답한 상황에서 이야기가 촉발되고 그것이 해결되거나/해결되지 않는 방식이 소설로 놓인다. 나는 '페이지 터너'라는 것을 별로 경험해 보지 못했는데, 이런 작가를 두고 페이지 터너라고 하는구나. 싶은 마음이었다. (이걸 왜 이제야 읽었지?)
책은 《우연 여행자》로 흥미를 돋우고, 《시나가와 원숭이》로 방점을 찍는 방식이다. 다소 도전적이거나 물음표가 곧 마침표가 되는 단편은 책은 중간 부분에 위치한다. 책의 가장 마지막 부분이어서 그런 것인지 인상이 깊게 남아서인지 시나가와 원숭이는 계속해서 내 머리를 뛰어다녔다. '말하는 원숭이'가 등장하기 때문일까... 가끔 어떤 감정을 느끼고도 이것을 쩐다! 개쩐다! 정도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나 자신을 한탄한다.
쩐다!는 것은 이른바 이 동물이 단순한 동물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영물靈物로 인식되기 때문인 것 같다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선, 영물이 뭘까 생각한다. 소설을 따라가면 잘못을 저지르고, 그것을 이해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인간 외의 것. 유사 인간. 인간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동물 혹은 사물... 원숭이는 인간과 모습이 너무 닮았는데도 인간이 하는 미저리 같은 짓을 하면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실은 인간이 제일 무서운 게 틀림없는 걸까. 아니면 어떤 외형을 갖고 있건 욕망이 발현될 때 한 면은 소름 돋게 징그러울 수밖에 없는 걸까. 무엇이든 자라날 때 마음 한편 이 징그럽듯이. 둥근 바퀴처럼 질문이 질문을 타고 나를 고민의 언덕 아래로 굴러가게 한다.
한국 문학에서도 원숭이는 어렵지 않게 등장하는 단어 혹은 오브제인데, 원숭이와 소통을 하는 것은 매우 드물게 느껴진다. 소설에서 인물의 성격과 특징을 설정하기 마련인데, 원숭이라는 것은 동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에 색을 입히는 과정이 되었으리라 짐작한다. 반대로 인간에게 원숭이라는 호칭을 붙였을 수도 있고.
이 책의 제목에 대해서도 적어두고 싶다. 보통 단편집을 묶을 때 단편을 모아서 표제작을 정한 뒤 제목에 달아 놓는데, 이건 전체적인 느낌을 보고 책의 제목을 정한 것 같다.'도쿄'와 '기담'이라니 둘이 붙어 있기만 해도 스산한 단어의 상성이 느껴지지 않는가.
자 이제 흥미를 느꼈으니 다음 책을 시작해 보자. 나는 용강에게 문자를 해서 하루키 책 중에 재밌는 것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용강은 <1인칭 단수>를 꼽았다.
1인칭 단수_문학동네
이 책 또한 단편집이다. 순서는 《돌베개에》, 《크림》,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위드 더 비틀스 With the Beatles 》,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사육제(Carnaval)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일인칭 단수》로 이뤄져 있다.
목차만 보고 앞서 읽은 《시나가와 원숭이》가 이름을 바꿔 단편에 실렸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것이었다. 서사로 따지면 도쿄기담집에 묶인 《시나가와 원숭이》가 먼저고, 그다음이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이다. 고백을 들으려면 일단 시나가와 원숭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앞서 읽어보는 것이 좋다. 처음 용강에게 단편이 똑같은 게 있다고 말했다가 이야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헐레벌떡 알려줬다.
이 책을 다 읽은 뒤 소웡과 용강과 함께 술을 먹다가 어떤 단편이 제일 좋았냐고 용강에게 묻자 《크림》을 꼽았다. 지금 찾아보니 이 단편은 2018년에 뉴요커지에 발표한 소설이라고 한다. 뉴요커에도 동명의 이름으로 발표했는데, 소설 안에서 "크림 중에 크림 Crème de la crème"이라는 대사가 프랑스어로 부제 형태로 달렸다.
《크림》을 짧게 소개하자면, 어릴 적 함께 피아노를 쳤던 친구로부터 초대장이 날아오면서 시작된다. 이후 주인공은 그곳을 찾아가지만 연주회장은 보이지 않고 공원에서 한 남자를 만나는데, 그 남자는 "중심이 여러 개인, 아니 무수히 많은, 그러면서도 바깥 둘레가 없는 원을 생각해 보라"는 말을 한다. 주인공은 그 장면을 곱씹는... 소설이다. 서사구조만 두고 보면 어딘가 밋밋한데, 풀리지 않는 매듭 같은 것이 존재해서 소설의 장면을 끝도 없이 생각하게 한다.(나는 생각하기의 전문가다) 도형의 모습이 무엇일지, 그 남자가 주인공에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말이다.
용강에게 그 말을 듣고 새벽에 집에 돌아오면서 나는 다시 소설을 생각했다. 택시에 타서는 2018년 녹사평 한 술집에서 대학 친구들과 새우요리를 먹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용강이 내게 <버닝>을 볼 것인지 물었다. 그때 나는 모종의 이유로 <버닝>을 보지 않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보지 않겠다고 하자 용강이 내게 귤을 까는 마임을 보여줬다. "손안에 귤이 있다고 생각해 봐"라면서 영화 속 대사를 일러줬다. 나는 그때 용강이 했던 행동(실은 버닝에 나온 것이겠지만)과 하루키의 소설이 정말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택시가 집에 도착했을 때 버닝 또한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한 영화라는 것이 떠올랐다. 하루키를 보고 하루키를 떠오르게 되다니 그에겐 분명한 일관성이 있구나. 책이 삶에 침투하고 그게 내 기억인지, 작품 속의 기억인지 계속 곱씹다가 어떤 순간에 한 부분이 흐릿해지는 것이다. 나는 하루키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내게 하려는 시도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끝끝내 그가 보여주려고 한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자 그럼 이제 장편 소설을 읽어볼까?
태엽 감는 새 연대기 1,2,3_민음사
태엽 감는 새는 1993년부터 1995년 사이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서 쓰인 장편이다. 이걸 어찌 아느냐고 물으신다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알려줬다. 앞서 말한 <도쿄기담집> 속 우연 여행자 텍스트 속에서 그가 경험한 일들의 시기를 꼽으면서, 이 책의 집필했다고 밝혔다. 앞선 두 권을 재밌게 읽었기 때문에 책 속에서 언급된 <태엽 감는 새>를 장편 입문작으로 정했다.
이 책은 민음사에서 나온 두 개의 판본이 있다. 하나는 세문전 판본이고, 하나는 하드커버로 된 판본이다. 짝꿍과 함께 읽었는데 나는 하드커버 판본으로, 짝꿍은 세문전 버전으로 읽었다. 하드커버가 개정판인데, 세문전 판본과 내용 상 아주 큰 차이는 느끼지 못했다. 짝꿍과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읽을 때는 소리를 내서 읽었는데도 서로 갖고 있는 텍스트가 대단히 다르게 읽힌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판본의 차이 때문인지 독자 성향의 차이인지 세문전 판본이 훨씬 빠르게 읽히는 것 같았고, 책의 두께도 더 얇았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는 각 권마다 부제가 달려 있다. 1권 -도둑 까치, 2권-예언하는 새, 3권-새 잡이 사내다. (이 책은 문학 사상사에서 나온 버전도 있는데, 그건 3권 새잡이 사내를 2부분으로 나눴다)
커다란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어떤 날 고양이가 사라지고 그 고양이를 찾다가 아내가 사라지며 주인공은 거대한 세계에 휘말리게 된다. (어쩌면 자신의 아내를 찾아나가는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인공의 여러 목표 가운데 그것만이 사라지지 않는다.)
1권-도둑 까치를 보면서 나는 몇 번 웃었다. 대부분 대사 때문이었다. 주인공의 직장동료 여성이 "충전해 줘. 나 방전됐어"라면서 자신을 어필(?) 하는 대사가 있다. 장면으로 읽었을 때는 어쩐지 기묘한 감이 있고 그 말이 이상하지 않았는데, 소리 내어 읽으면서 그 대사가 현실에서 이뤄졌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 단전에서부터 웃음이 올라왔다. 대사가 너무 주옥같아서 나는 그 말을 짝꿍에게 자주 했다. 짝꿍과 책을 비슷하게 읽어가면서 책의 모든 대사와 순간들이 우리만의 밈이 됐다. 어쩌면 문학도 일상적인 밈이 될 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우리가 어디선가 만나는 드라마 속 대사들도 희곡이라는 거대한 문학의 뿌리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텍스트라는 기둥 가장 밑에 문학이 있다고 나는 믿으니까.
1권에서는 아내가 사라지기 전에 자신의 삶에 대해 다룬다. 아내와 결혼하게 된 이야기, 아내의 집안 사정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고 긴 연대기의 이른바 밑밥이 된다. 아내의 집안은 혼다라는 영매를 신뢰하는데, 그의 죽음으로 혼다와 함께 군 생활을 했던 마미야 중위를 만나게 된다.
1부의 후반부에서는 마미야 중위의 전쟁 시기를 다루고 매우 강렬했다. (이후에도 이 이야기는 연대기를 통해 전개된다) 나는 무협과 전쟁 같은 이야기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인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나도 오래전에 전쟁에 참여했던 것 같이 생생했다. 적 앞에서 두려워하고, 불쑥 튀어나오는 전우애가 있으며, 죽어서도 지켜야 하는 신념 같은 것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부분을 읽을 때 나는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하구가 보이는 파주의 한 카페 창가에 앉아 있었다. 강에서 어떤 사람이 떠내려올 것 같은 느낌에 시달리면서, 그것이 왠지 (지리 상으로 옳지 않더라도) 적군일 것 같다는 이상한 예감을 짓누르면서 책을 읽었다.
마미야 중위의 이야기 속에는 잔인한 부분도 있었지만, 인간적인 묘사에 마음이 동했다. 전쟁을 통과하면서 한 인간이 변해버린 것. 특히 "집에 오니 묘가 있었다"라는 말,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삶을 계속해 살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훤했다. 그러면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 지는 것, 이기는 것, 다치는 것 모두 또 다른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일인데도 말미엔 운명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점치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마미야 중위의 이야기가 끝나면 1권이 끝난다. 책을 덮자마자 내가 했던 말은 "이거 뭐야? 무협이야 치정이야 멜로야 판타지야?"였다.
그도 그럴 것이 1권은 인물들이 갖고 있는 배경을 보여주기 위해 힘쓴다. 1권을 읽는 동안 나는 서사가 진행된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2권에 들어서자 1권은 사실상 인물의 배경을 보여주기 위한 두툼한 발판일 뿐 전체 서사에 일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중반부에서 아 여자가 왜 이렇게 많아-라는 말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 있었다. 남성 주인공에게 준 애인 정도로 여겨지는 여성이 많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자 책에서 신기하게도 "여자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는 문장이 등장했다. '하루키 적이다'라는 말이 정확히 어떤 말이라고 1 대 1로 정의할 순 없더라도 이런 순간을 하루키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2권-예언하는 새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우물이다. ' 우물'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우물은 앞서 등장한 마미야 중위의 이야기에서 비중 있게 등장한다.
소설에서 우물은 깨닫는 공간이다. 동시에 어디론가 진입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 설정을 이해하기까지 여러 과정이 필요했는데 그가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환상 공간에 진입하는 것인지 판단하기 난감했다. 무엇보다 모든 인물이 갖고 있는 알 수 없는 환상성...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지만 이렇게 모든 인물에게 나눠진 물음표의 뉘앙스를 살피면서 나는 또 "누가 범인인가"의 가까운 폭탄 감지 센서를 켰다. 결과적으로 이 안에 범인이랄 것은 없다. 다만 지속되는 불행에 원인을 밝혀내고자 한다.
옷장도 아니고 정원도 아니고 우물이 등장하면서 제공되는 자연스러운 스산함으로 나는 내내 두려워해야 했다. 20년 전쯤 내가 살던 조부모의 집에도 우물이 있었다. 그 우물은 지하수를 퍼올리는 우물로, 서너 명이 팔을 두를 정도의 크기의 아주 깊고 서늘한 우물이었다. 무엇보다 그 안에 물이 너무나 차가웠다는 것, 내가 아는 어둠보다 두려운 것이 그 안에 있었다. 한 여름에 아빠에게 여기에 들어가면 어떻게 돼?라고 질문한 적도 있었는데 아빠는 고민하더니 죽지.라고 말했다. 어린 날 아빠에게 들은 대답에 따르면,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우물에 들어가는 인물들은 죽어 마땅하다.
다만 하루키의 우물은 지하수가 나오지 않는 마른 공간이다. 그 안에 갇혀 용도에 맞지 않게 우물을 사용하게 되면서 인물은 거기서 계속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계속해 말해볼까. 이 우물은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요소로 완전한 삶과 죽음을 연결한다기보다는,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순간이 있는 장소다. 도 죽음도 아닌 장소는 결국 환상 세계와 연결되고 인물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접하거나, 자신의 삶에 깃든 운명을 직시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지만 '환상성'의 공간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에 꼬박 2.5권이 걸렸다. 너무나 많은 인물의 등장(때로는 인물들이 맥거핀이라고 생각했다), 출구 없이 고여 있는 우물 다운 서사 때문일 것이다. 계속해 반복되는 말들을 독자가 스스로 찾아내서 연결해야 한다. 때문에 1권에 비해 2권의 독서 시간이 길었다.
3권-새 잡이 사내 앞선 2권보다 두툼한 분량을 가진 3권은 가장 오래 읽은 책이다. 3권으로 이뤄진 책을 골라 읽는다면 으레 3권에서는 사건이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3권에 중간까지 해결됐다고 판단할 방법이 없었다. 주인공은 계속해 방황하고 있었고 그 마음은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됐다. 주인공은 아내를 찾는다는 목표, 그리고 이 불행의 실체를 파헤쳐야 한다는 초목표를 갖고 나아간다. 어느 순간 포기해야 한다고 주인공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은 못해요. 다 읽고 나서 몇 개의 후기를 찾아보니 실제로 주인공이 목표 달성에 성공했다고 보는 독자도 있고 실패했다고 보는 독자도 있었다. 지지부진함으로 볼 수도 있고, 강한 집착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하루키가 특정한 단어나 오브제를 굉장히 좋아하고, 그것을 소설에 녹여내길 좋아한다고 느꼈다.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인간을 동물화하는 것이 그러했다. 개, 원숭이, 소, 고양이(심지어 자신이 잃어버린 고양이의 이름을 '삼치'라고 재명명하기도 한다)...
동물에 대한 하루키의 애정도를 잘 보여주는 것이 오시나와라는 인물이다. 나는 이 캐릭터가 가장 재밌는 형태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우시라는 이름은 일본어로 소를 의미한다고 쓰여 있다. 그 단어처럼 오시나와는 어떤 면에서 근면 성실함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그보다 어떤 동물적 감각을 앞세우는 특이한 캐릭터다.
아내의 오빠인 오타야 노보루의 정치적 하수인으로 등장하는 그는 외적으로도 내적으로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기도 하다. 자신이 살 궁리를 하고, 아내와 자식이 있지만 그저 존재할 뿐 그들에 대한 부양 의무 같은 것은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폭력성을 드러내기 위해 가족들을 미끼 삼아 발화하는 때로는 짐승만도 못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나는 앞서 보았던 인간을 사랑한 시나가와 원숭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숭이에게 인간의 면모를 넣고, 사람에게는 동물의 면모를 넣는 하루키 선생님... 그는... 정말 이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 감정적으로 다가간다면 '불쾌함'일 것이고, 그걸 조금 더 파고들면 인간도 동물이다.(바이스 벌사) 동물은 본능을 따른다는 꼬리잡기 귀결로 나아갈 수 있다.
아울러 그의 작품을 통과하며 도드라진다고 느낀 가장 커다란 요소 중 하나는 잦은 음악의 등장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그중에서도 재즈와 클래식을 사랑하는 하루키의 배경에 따라 책에서는 재즈와 클래식이 자주 등장한다. 내게도 그런 두터운 배경이 있다면 그가 일러주는 음악이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흐르겠지만 90%는 내가 모르는 것으로, 가만히 책을 읽다가도 유튜브 뮤직에 그 음악을 쳐보는 것이 루틴처럼 이어졌다. 이게 과연 독자에게 재밌는 상황인가? 독자가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흠... 하고 회의적인 대답을 하게 된다. 음악을 상상하다가 그것이 내 예상과 완전히 다른 상황일 때 실망하게 되지 않을까. 그럼에도 음악의 등장을 멈추지 않는 것은 그것이 작가에게 중요한 요소구나 느낀다. 독서와 독서 가운데 하릴없이 릴스를 넘겨보다가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이 좋다는 댄서 립제이의 인터뷰를 보았다. 작가면 책만 읽고 쓰는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체험하고 경험하면서 영감을 받기도 하고 글의 원동력을 얻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하루키에게 음악은 문학적인 딴짓일까? 혹은 문학이 음악적인 딴짓일까? 그런 선후관계를 생각하면서 나는 홀로 흥미로워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손짓에 대해 생각한다. 소설은 접혀 들어간 부분을 묘사하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지금과 그때가 아닌 세계. 오래전에 <1Q84>를 들춰본 뒤 어떤 불쾌한 감정을 느끼고, 그것이 진짜 존재한 장면인지 나 홀로 기억을 덧입힌 것인지 곱씹어 본다. 존재한 걸까? 하루키의 모든 작품에서 같은 질문을 그리고 독자인 나의 기억까지 질문하게 한다.
그의 작품관으로 미루어보아 존재해도 이상하지 않을 장면이라는 것을 감각하면서도 이상하게 아직까지 그 책에 손을 뻗고 싶지 않다. 동시에 계속해서 하루키 읽기를 멈추고 싶지 않다.
<<어쩌면 2편에 계속>>